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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이 세를 확장하던 16세기 초의 이스탄불 시대에도 추출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이 제국은 셀림 1세가1519년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궁중에서도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고 궁 안에서 조달과 시중 등을 담당하는 하인들이 따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였고 1536년 생산지였던 예멘을 이 나라가 점령한 뒤부터 일반인들에게도 빠르게 퍼졌고 졸음을 쫓아주는 각성 효과와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효능 때문에 군인들에게도 지급되었는데 이를 통해 점령한 수많은 나라에도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625625 전쟁 때 미군을 통해 인스턴트 분말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과 같이 말입니다.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해지며 꽃을 피운 커피 문화

터키의 독특한 기구와 풍습

터키와 시리아의 장인들은 원두를 로스팅할 때 쓰기 위한 손잡이가 달린 냄비형 로스터와 긴 실린더형 로스터를 만들어냈고 손잡이가 달린 실린더형 로스터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제작연도가 1650년1650 경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당시의 기구는 손잡이를 돌리며 편하게 로스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지만 단점도 있었습니다. 볶을 때 로스팅 정도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고 로스터 기구가 발명될 만큼 17세기에는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 인기의 정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당시에 일부 몰지각한 상인들이 원두 자루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몰래 납 가루를 뿌렸다는 기록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고 이집트를 점령하기 전부터 이집트에서도 이미 볶고 갈아서 물로 끓여 마셨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지 않고 그렇지만 제국으로 전해진 뒤로는 터키인이 먹는 방식이라는 의미의 터키시 음용법이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장 드 테베 노란 사람이 1666년부터1666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9개월9 동안 체류를 하고 여행기를 썼고 그는 볶은 뒤 빻아서 긴 손잡이가 달려 있고 위보다 아래가 넓은 모양을 하고 있는 체즈베라는 도구에 끓여 마시는 과정을 자신의 여행기에 자세하게 적어 두었습니다. 가늘게 분쇄한 뒤 거품이 세 번씩 끓어오르게 해서 마시는 독특한 방식은 독특한 음용법으로 뿌리를 내렸고 가루를 물과 함께 끓이면서 거품이 위로 넘치려고 하면 불에서 멀리 떨어뜨려서 거품을 줄이는 과정을 3번 반복합니다.

출처:필자가 직접 촬영함.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해지며 달라진 점

그리고 달걀 반 개만 한 크기의 잔에 따라내어 마시는데 이때 거품은 신선함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였으며 당시에는 거품이 많이 생기도록 끓이는 게 기술이라는 인식도 퍼져 있었고 터키시 방식은 특유의 강렬한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설탕을 넣거나 향미를 좋게 하려고 카르다몸이나 정향과 같은 향신료를 넣어 끓여내기도 합니다. 이런 터키의 문화는 독특한 방식과 전통 계승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스탄불에서 터키시 방식으로 추출법이 표준화되어 점령지와 무역 경로를 따라서 전파되었으며 에티오피아에서 예멘으로 전해진 뒤 거의 1000여 년을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권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종교도 대륙도 다른 지역으로 전해진 것이며 여러 효능과 카페인의 강한 중독성으로 인해 초기부터 안착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점 외에도 유럽인의 취향 자체가 맛과 멋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었고 이러한 배경은 다양한 추출법과 음용법을 발전시키게 되었으며 1096년부터1096 약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컬처와 서남아시아의 이슬람 컬처를 교류시키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서로 소통하며 1615년부터는 수입했고 무슬림들은 신의 음료로 받아들이고 밤새 코란을 외우기 위해 마셨고 반면에 그리스도교인들은 병을 고쳐주는 일종의 건강식품으로 여겨 생활 속에서 자주 마시면서 카페인의 효능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생활 속의 정착과 주요 사건으로 인한 가속화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에 세례를 주면서부터는 그나마 남아 있던 거부감이 사라지며 삶 속으로 더욱 깊게 들어오며 그들에게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음료였기 때문에 음용법이 더욱 세련되게 발전할 수 있었고 먼저 미세한 가루를 끓여내어 그대로 마시던 터키시 방식과 달리 사람들은 주전자에 담아 말린 풀로 마개를 만들어 앞에 끼워서 따르는 방식으로 가루의 불쾌한 이물감을 없애려 했습니다. 훗날 필터의 원조인 셈이며 아랍으로부터 전해짐으로써 이처럼 더 나은 향과 미를 추구하는 새로운 풍조가 시작하게 된 것인데 전파의 계기가 된 주요 사건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1683년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며 시작된 빈전투이고 연합국들이 오스트리아를 사수한 이 전투는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의 기독교 국가 전체를 지켜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폴란드의 가세로 혼비백산한 침략국은 힘들게 신고 온 생두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퇴각했고 산더미처럼 남은 이 생두들이 오스트리아로 전해져 비엔나커피를 탄생하게 만들었는데 아랍 지역에 자주 방문해서 정세 등에 밝았던 군인 프란츠 콜 시츠키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활용해 1683년 빈에 하우스를 열었고 고전음악의 탄생지인 오스트리아의 빈답게 이 곳 사람들은 터키식으로 끓이되 이를 여과장치로 거르고 우유와 꿀을 넣어 부드럽게 즐기며 그들만의 방식을 꽃피울 준비를 차곡차곡해나갔습니다..

 

※논문 출처 : 국제정세와 무역품의 항해 경로 사이의 상관관계 (2009 안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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